보라 이 사람을(욯19:4-5),예안성경학교 기도회(231026,목), 허만혁목사(010-7375-0691) ;헌금(예안교회,농협:351-1130-8521-13)

LOGOS(예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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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بار بازدید - 9 ماه پیش - (138)보라 이 사람을!{욯19:4-5 ; 맡27:45-56
(138)보라 이 사람을!
{욯19:4-5 ; 맡27:45-56 ; 찬송가: 찬311(통185)
A.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ti, 1589~1623)의 간증 :
그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로서 주로 로마, Mantua, 베니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초기에 치골리(Ludovico Cigoli) 문하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종교적 주제가 녹아 있는 소형 풍속화를 주로 그렸으며 초상화가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콜레지오 로마노(Collegio Romano)에서 교육받았으며 어렸을 때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뒤 루도비코 치골리에게 사사하였으며 루벤스와 플랑드르 화파, 네덜란드 그림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13년부터 1622년까지 만토바(Mantua) 페르디난도 곤차가의 궁전화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렸다. 1622년부터는 베니스에서 그의 화법은 더욱 색채를 강조하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대표적인 베네치아파 미술가로 자리잡게 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유형에 적합하도록 보다 작은 그림들을 다루었으며, 신약성경의 장면들을 대표하는, 비유들의 이름이 붙여진 그의 작품들은 The Dresden Gemaldegalerie에 보존되어 있다. 만토바 성당의 프레스코화 등의 대작을 그렸으나, 이러한 작품들보다 당시의 생활풍속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작은 규모의 풍속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멜랑콜리 Melancholy≫(1620), ≪다비드 David≫(1620), ≪선한 사마리아인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1623), ≪어느 배우의 초상 Portrait of an Actor≫(1623)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작품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중요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
가. “보라 이 사람을”{“에체 호모”(Ecce Homo)}(욯19:4-5) :
도메니코페티가 자신의 그림에 큰 충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
그 당시에는 성화를 그리지 않으면 명성 있는 화가가 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성화를 그려서 대가가 된 것이다. 그는 대가가 되고 싶어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고난 당하는 모습을 반쯤 그렸지만 더 이상 영감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그는 고민하던 중 그 그림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는 고민 하던 중 길거리로 나가 멋진 여자들을 보았다. 여인들의 누드 그림을 그리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여인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그는 한 여인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싶으니 모델이 되어 주면 후히 사례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여인은 가난한 집시였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화실로 데려가 여인의 나체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시 여인이 화실 한 편에 있는 한 그림을 보았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의 그림이 있었다. “선생님, 저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고통 스럽게 죽어갑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사람은 예수라는 사람인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라오,” 그러자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던 집시 여인이 되물었다. “우리의 죄라구요? 그 분이 정말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라고 다시 반문했다.
그 순간 도매니코 패티의 가슴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듯 철렁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집시 여인의 입에서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여자의 누드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대신 그는 교회에 나가 엎드렸다. “주님, 주님께서 정말 저를 위해 죽으셨나요? 제 죄도 주님께서 지시고 돌아가셨나요? 정말인가요? 주님, 알려 주세요.”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붓을 들고 중단하였던 그 그림을 완성했다. 바로 그 그림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던 “에체 호모”(Ecce Homo) 즉 “보라 이 사람을”이다. 특별히 그는 그 그림을 완성한 후,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그 그림 아래 라틴어(로마어)로 “Ego pro te haec passus sum (에고 프로 테 해크 파수스 숨). Tu vero quid fecisti pro me (투 베로 퀴드 풰씨스티 프로 메)
"This have I suffered for you ; now what will you do for me?"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나. 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 5.26~1760. 5. 9) 백작(모라비안 형제단 창시자)
그는 19세에(1719년) 네덜란드와 프랑스로 연구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독일의 뒤셀도르프 박물관에서 도메니코 패티가 그린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그림 앞에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그림의 이름은 “보라 이 사람을!”(Ecco Homo)였다. 그러던 중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갖게 된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내용의 비문이 있었는데, “나는 너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였다. 19세의 어린 진젠도르프는 그 박물관의 성화 앞에서 울면서 크게 헌신하기로 다음과 같이 결단헸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저는 당신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그는 성장하여, 주님께 결단한 그대로 모라비안 형제단 창설해서, 자신의 생명과 전 재산을 바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훈련하여 파송 했으며, 세계 선교사에 뚜렸한 족적을 남기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한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자 잘 알 수 있다. 그것이 통로가 되어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한다.
"주여, 저로 하여금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수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다.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걸( 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43세) :
1. 찬311(통185) : “내 너를 위하여”
영국에서 태어난 찬송 작가 H. “내 너를 위하여”란 찬송가311(통185)을 작사한 사람이다. 그녀가 몸이 심히 쇠약하여, 아버지의 권유로 세계 여러 곳으로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독일 뒤셀돌프에 있는 어느 목사님 댁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목사님 서재에서 가시관을 쓰고 계시는 “에체 호모”(Ecce Homo)란 이름이 붙여진 예수님의 성화를 바라보게 되었다(그림 참조). 그리고 그 성화 아래에는 두 줄로 짤막한 좌우명이 라틴어로 쓰여져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충격을 받아 그 순간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독일 목사님의 서재에서 즉석에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는 찬송시{찬311(통185)(23세)를 썼다.
9 ماه پیش در تاریخ 1402/08/04 منتشر شده اس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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