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 이애리수 (1932)

Papermoon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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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9 هزار بار بازدید - 13 سال پیش - 황성옛터/황성의적 (1932)노래 : 이애리수 (1910-2009),
황성옛터/황성의적 (1932)
노래 : 이애리수 (1910-2009),  작곡 : 전수린,    작사 : 왕평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 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 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 터야 잘 있거라

(퍼온글)
이애리수:

경기도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 '애리수'라는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애리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 활약하면서 막간 가수로도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소박한 창법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세때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옛터'로 국민가수로 등극한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고려 옛 궁궐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노래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국민들의 마음을 적셨다. 특히 '황성옛터'는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기도 한다.

1931년 '메리의 노래', '라인강' 등의 노래를 담은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 이애리수는 다음해 '황성의 적'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은 5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5만장은 현재 기준으로 500만장에 육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노래를 통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상기할까 걱정된 일본 경찰이 이 음반을 발매금지 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애리수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애리수는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딴따라' 취급 받던 가수와 엘리트였던 대학생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독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구출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은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를 부르고, 그의 애처로운 노래를 들은 배씨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이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아직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3 سال پیش در تاریخ 1390/08/06 منتشر شده اس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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